원전 기술독립의 교훈과 우리의 과제

한국 원전산업계는 최근 웨스팅하우스와의 합의서 관련 논란으로 큰 사회적 관심의 중심에 서 있다. 이번 사안은 단순히 기업 간의 법적 관계를 넘어, 우리 산업계가 지난 수십 년간 축적해온 기술역량과 향후 원전수출의 지속가능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 특히 “기술자립(technological self-reliance)”과 “기술독립(technological independence)”의 해석을 둘러싼 논의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한국은 1970년대 상업용 원전 도입 이후, 설계·제조·시공·운전 전 분야에서 꾸준한 국산화를 추진해 왔다. 그 결과 APR1400의 독자적 설계 인증을 획득하고, 해외수출에도 성공하는 등 괄목할 성과를 이뤘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핵심 원천기술의 확보가 미흡하다는 점이 이번 논란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산업계와 연구계 모두가 기술적 완성도뿐 아니라 지식재산권(IP) 체계와 국제 기술이전의 구조를 보다 면밀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사실 기술의존은 원전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반도체나 자동차산업 역시 특정 공정기술이나 핵심소재에 대해 해외 기업에 상당한 수준의 기술료를 지불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외국 기술을 단순히 모방하거나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기술적 패러다임을 창출해내는 ‘혁신을 통한 자립’이다. 원전산업 역시 이러한 전략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과거 프랑스와 중국의 사례는 우리에게 의미 있는 시사점을 준다.
프랑스는 1970년대 웨스팅하우스의 기술을 도입하면서도, 이를 단순한 기술이전이 아니라 자국 표준형 노형 개발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국영전력공사(EDF)와 프라마톰(Framatome)이 중심이 되어 ‘프랑스형 표준노형(PWR)’을 개발했고, 전력정책·산업정책·기술개발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체계를 통해 1980년대 중반에는 사실상 기술독립을 달성했다. 이후 프랑스는 자국 기술을 기반으로 유럽과 중국 등지에 수출하며 ‘핵주권(nuclear sovereignty)’을 확립했다.

중국은 프랑스 및 캐나다, 러시아 등 다양한 기술을 도입하는 전략을 택했다. 다원적 기술협력으로 기반을 넓히면서도, 자국 내 원전건설 경험을 체계적으로 누적시켜 ‘중국형 표준노형(CPR1000, 이후 Hualong One)’을 완성했다. 초기에는 프랑스의 기술 의존도가 높았으나, 정부 주도의 대규모 연구개발 투자와 인력양성을 통해 2000년대 후반 이후 설계·제조·건설의 대부분을 자력으로 수행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러한 중국의 사례는 장기적 전략과 정책 일관성, 그리고 기술이전 이후의 내재화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이 다시 ‘기술자립’과 ‘기술독립’을 논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기술의 소유 여부를 넘어,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에너지 안보의 관점에서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세계 원전시장은 2050년까지 현재의 2배 이상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탄소중립과 에너지안보가 국가정책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원전 기술과 공급망을 확보한 국가들이 새로운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한국 역시 이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기술경쟁력을 강화하고 글로벌 협력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기회를 맞고 있다.

그러나 기술주권을 강화하는 방식은 과거처럼 ‘폐쇄적 독립’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글로벌 시대의 기술자립은 개방적 협력을 전제로 한다. 미국, 유럽, 아시아 각국이 SMR(소형모듈원전), 핵연료주기, 사이버보안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제적 협력을 강화하고 표준을 공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국제공동연구와 상호인증 체계 속에서 기술경쟁력은 오히려 강화될 수 있다.

또한 국제 핵비확산 체제의 두 축인 안전조치(Safeguards)와 수출통제(Export Control)의 철저한 준수는 향후 원전수출의 기본 전제이다. 이는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국제사회에서의 신뢰 확보를 위한 필수조건이며, 기술개발과 수출 모두의 지속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기반이 된다.

지금 우리는 원전산업의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다. 기술자립의 한계를 직시하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실질적 노력을 가속화해야 한다. 과거 프랑스와 중국의 경험처럼, 단기적 이익보다 장기적 기술주권을 중시하는 전략적 인내와 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 원전산업계가 이번 논란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기술경쟁력과 국제신뢰를 동시에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기술독립은 단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산업철학과 국가비전을 재정립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한국원전수출산업협회 사업본부장  남요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