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새벽 BBC는 “윤석열, 20대 한국 대통령에 당선.. 1% 포인트 내 초접전 끝 승리”라는 한국발 뉴스를 타전했다. 그보다 늦었지만 “초박빙 혈투 끝 신승”이라고 쓴 연합뉴스가 더 실감났다. 불과 25만표, 역대 최소 표차였다. 혈투라는 표현이 와 닿은 건 윤 대통령이 공약한 탈원전 폐기가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이다. 원전의 운명이 결정될 선거 개표방송을 지켜보던 때를 회상하면 아직도 아찔하다. 나는 당시 탈핵을 선언한 문재인 정부로부터 친원전 인사로 찍혀 있었고, 나름 고생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ㅇㅇ의원은 대선 패배를 꿈에도 생각 못했겠지만.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원으로서 “우리나라는 에너지여건이 열악하여 적정수준의 원자력이 필요하다”, “특정 에너지원, 태양광의 독주는 위험하다”는 말을 여기저기 하고 다녔으니 문정부에 밉게 보인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누군가는 코웃음 칠지 모르지만 나는 아직도 스스로를 중립적이라고 생각한다.

문정부에 찍힌 결정적 계기는 신고리 5,6호기(새울 3,4호기로 개명) 공론화 과정에서 건설재개 측에 참여했기 때문이리라. 소신은 있었지만 얼떨결에 참전했고, 참전해서 이겼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이후는 날개 없는 추락이었다. 사례 몇 가지. 사전고지 없이 각종 위원회에서 하차되었고, 토론회 발표내용에 대해 해명자료 제출 요구도 받았으며(당시에는 언론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다), 누군가 통신기록을 들여다보는 등 형태는 다양했다. 그래도 가장 서러웠던 일은 연구원의 명예직 기회박탈이었다. 경제적 손실도 손실이지만 하루아침에 천하무적(無籍)이 되었다. 지금 보면 그리될 줄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 같은데, 그들이 얼마나 좋아했을지 눈에 선하다.

하지만 그 사건들이 지금의 나를 존재감 있게 만들어 준 계기였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코너에 몰렸던 상황에서 금동앗줄을 내려준 분이 현 원자력연구원장이다. 벌이는 시원치 않았지만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한 번 찾아오겠다”던 정보관은 아직도 안 오고 있다. 오지 않아 다행이지만.

개표 직후 ‘이제 내가 할 일은 다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닌 거 같다. 얼마 전 국회입법조사처 유모 입법조사관은 ‘탈원전 정책에 따른 전력구매비 상승 분석’ 보고서를 한무경 의원실에 제출했다. 유조사관은 탈원전 5년간 한전의 구매비용이 7차 전기본(‘15.7월)에 비해 최대 26조 증가한 것으로 분석했다. 유조사관의 분석은 ’18-‘22년으로 탈원전 비용 분석을 한정하고 있으나 그게 다가 아니다. 문정부 탈원전 5년의 파급영향은 2030년 이후까지도 지속된다. 유조사관 분석결과의 비교검증과 2030년까지의 탈원전 비용을 계산하고 있는 중이다. 다한 줄 알았던 할 일이 아직 많은 거다.

아직도 야권의 일부인사들은 문정부 5년간 탈원전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탈원전은 정치적 프레임이지, 우리나라는 실제 탈원전을 한 적이 없다”는 TBS에 대해 방심위가 법정제재(주의)를 의결했음에도 고집 세게 우긴다. 야권인사들은 집단적으로 건망증에 빠졌거나 중증의 우김병에 걸린 것 같다.

새 정부가 출범하고 10차 전기본이 수립되었다. 신한울 3,4호기 건설 재개와 10기 원전의 계속운전이 반영되었지만 신규원전 건설은 포함되지 않았다. (사)사실과과학 네트웤은 신문에 광고까지 내면서 ‘누가 윤석열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가?’라고 했고 야권과 환경단체들은 ‘30년 신재생 비중이 후퇴(30% → 22%)했다’며 비난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36년까지인 10차 전기본에 신규원전이 반영되지 않은 것은 잘못된 것으로 생각한다. ’33년 신한울 4호기 준공이후 적어도 4년간 신규원전이 없다는 것은 문정부 5년에 준하는 정도로 원전 산업계의 일거리가 단절된다는 뜻이다. 문정부 5년간 원전업계의 매출은 42%, 종사자는 18%가 감소했다.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면 원전산업은 치명타를 입게 될 것이다.

금년 4월 탄녹위에서 의결된 ‘국가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은 10차 전기본 보다 더 민망하다. 산업체 부담을 덜어 준다며 산업부문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 그 대부분을 전력부문으로 떼어 넘겼다. 그 결과 2030년 신재생 비중은 21.6%+ɑ로 되었다. ɑ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두루뭉술 넘어 건 것이다. 10차 전기본과 충돌을 회피하려는 의도로 읽히지만 해도 너무했다. 녹색 옷을 입는다고 녹색성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지 않는(못하는) 정부가 들어선 탓일까? 1년이나 지났음에도 지난 정부인사들의 버티기는 여전하다. 동아일보는 윤 대통령 당선 1년 후인 지난 3월 공공기관장 임명 현황을 조사했다. 조사대상 367명 중 78.5%가 전 정권 인사로 분류되었다. 원전계에도 ‘잘가라 핵발전소’의 김제남 이사장이 건재하다. 탈원전을 주도했던 인사들이 탈원전 폐기 후에도 원전기관에서 월급을 받는 것은 여러모로 이상하다.

국민들에게 가짜뉴스와 괴담을 퍼뜨려 원전, 방사능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일도 더 빈번해졌다. 후쿠시마 처리수의 해양 방류 문제는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다. 국민들은 방사선 공포에 빠지고 선동가들의 밥그릇은 커지겠지만 그렇다고 국민들이 고등어를 안 먹는 것도 아니고 일광수산의 횟값이 떨어지지도 않는다. 기장미역 이나 영광굴비가 최고인 것은 원자력 공포하고 아무 관계가 없다.

원자력계는 잘하고 있나?

10차 전기본에서 신규원전이 빠진 것, 후쿠시마 처리수 문제 등에 문정부 이전에 비해 활발히 대응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주로 개인 명의의 이런 대응들이 원자력학회, 방사선방어학회의 공식적인 입장인지는 불분명하다.

국민들이 답답해 하는 만큼 사과넷 할배들도 그런 것 같다. 사과넷 할배들은 원안위와 식약처에 “후쿠시마 처리수가 방류되면 우리는 생선을 먹지 말아야 하는가? 먹지 말아야 한다면 언제까지 먹지 말아야 하는가?” 등의 거칠지만 직설적인 질의 공문을 발송했다. 4.27일까지 회신을 요청했지만 예상대로 답은 없다. 간접적인 답변(원안위·KINS ‘후쿠시마 오염수 대응현황’ 기자간담회, 서울신문 5/1)만 있었을 뿐이다.

임기가 다 된 기관장 자리가 하나 둘 나오고 있다. 숨어서 활동하던 애국자들은 왜 그리 많은지. 선의의 경쟁은 좋지만 악의적인 흠집내기, 흑색선전은 피해야 한다. 국민들 눈에 볼썽 사납게 비칠 거다.

할 일은 많은데 세월은 너무 빠르게 간다.

서울대학교 원자력정책센터 연구위원   노동석